봄비가 내린다, 나의 청춘에도


봄비가 늘어날 것이라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한반도의 기후가 온대성에서 아열대성으로 변화함에 따라 우기가 한국의 봄에서도 나타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과학적 사실이 어떻든 지구온난화가 어떻든 나에게 가장 주요하게 다가온 정보는 봄에 비가 더 많이 온다는 사실이었다. 산뜻하고 보송해야 마땅할 봄이 이제는 습하고 눅눅할 것이라니, 비를 몹시 싫어하는 내게 비극적인 소식이 아닐 수가 없었다.

 

나는 비가 싫다. 신발에 빗물이 스미고 양말과 바짓단이 젖는 찝찝함이 싫다. 먹구름에 가려 어둑한 날씨가 싫고 잊고 있던 요통이 찾아오는 것이 싫다. 습한 날씨면 나는 축 처지곤 한다. 비가 오는 날은 약속도 모조리 취소하고 집안에 틀어박혀 김광석이나 유재하의 흘러간 가요나 찾아 듣는 것이 좋다. 습한 빗물 속에서 돌아다니는 것은 질색이다. 비오는 날은 창밖에 종종걸음으로 돌아다니는 우산들을 구경하는 재미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럼에도 어쩔 수 없이 빗속으로 발을 내밀어야 하는 날이 종종 있다. 꼭 해야만 하는 일이 있는 날이 그렇다. 학교를 가야하는 날이 그렇고, 시험을 보러 가야하는 날이 그러하며, 아르바이트를 해야 하는 날이 그렇다. 그리고 인생의 봄이라던 청춘이 그렇다. 청춘 동안에는 꼭 해결 해야만 하는 과제가 있다.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답을 구해야만 한다. 때로는 시행착오를 겪고 함정에 빠져 헤맬 수도 있겠지만 우리는 짧은 청춘 안에서 미래를 찾고 그 희망을 엿보아 전진하기 시작해야 한다. 그제야 우리에게 남은 수십 년을 의미 있게 보낼 수 있다.

 

나 역시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해답을 구하기 위해 발버둥치고 있다. 그 과정은 마왕의 성에 갇힌 공주를 구출하는 왕자의 모험만큼이나 힘이 든다. 아무래도 처음 살아보는 인생인지라 어리바리하다. 일단 몸부터 부딪혀 보고 그 다음 눈치껏 다음 길을 살핀다. 간혹 현실의 가시에 베여 상처가 날 때도 있고 길을 잃어버려 막막한 기분에 주저앉고 싶을 때도 있지만, 해답을 찾는 일을 멈출 수는 없다. 그 해답을 토대로 탄탄대로의 인생을 설계해야 한다. 의미 있는 삶, 행복한 삶을 나는 원한다. 멋진 미래를 위해 나는 내 봄을 바칠 준비가 되어 있다.

 


그러나 봄이라던 청춘에 비가 온다. 안 그래도 버거운 방향 찾기에 새로운 방해물이 등장했다. 하늘에서 내리는 비라는 놈은 다른 방해물과 달리 쓰러뜨리기에는 너무 거대하다. 가시덤불이 나타나면 어떻게든 베어 넘기면 그만이고, 막막한 기분에 주저앉고 싶을 땐 잠시 쉬었다 힘을 내면 그만이다. 하늘에 잔뜩 낀 먹구름을 내 힘으로 걷어낼 수는 없기에 비가 하늘에서 내리는 족족 맞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나는 비를 원망하기 전에 앞서, 도대체 이 비가 왜 내리는 지 그 근원을 고민해보기로 했다. 한국의 늘어난 봄비처럼 내 청춘에도 아열대성 기후가 왔기 때문인 것 같지는 않다. 나는 대신 그 원인을 불안에서 찾았다.

 

한국의 청춘들은 불안을 겪는다. 자신만의 해답을 찾으려 하는데, 이 세상에는 아무래도 모두가 암묵적으로 동의하는 정답이 이미 존재하는 것 같다. 좋은 대학을 가고 좋은 스펙을 쌓고 대기업에 들어가야 한다고 사회는 이야기한다. 나는 그러고 싶지 않은데 주변의 압박이 거세다. 친구들은 이미 출발했는데 나는 아직 출발선상에 서 있는 것만 같다. 같은 정답을 가지고 만든 인생의 도안은 다들 엇비슷하다. 문제는 그 도안의 재료들이 한정되어 있다는 것이다. 다들 치열하게 그 재료를 쟁취하기 위해 경쟁하는데, 나 혼자 뒤쳐져 가시덤불 속에서 이리 저리 부딪히며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해답을 찾고 있는 것 같다. 지금 내가 잘하고 있는 지 확신할 수 없고, 멋진 미래를 위해 시작한 모험이 오히려 불안정한 미래를 만드는 것처럼 느껴진다.


어렸을 때 학교는 내게 노력하면 내가 되고 싶은 무엇이든 될 수 있다는 믿음을 주입했다. 그 믿음은 내 마음에 진리처럼 새겨져 치열한 10대를 버텨내게 했다. 봄이 오면 내가 되고 싶은 무엇에 따라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해답을 찾고 멋진 미래를 위한 도안을 그릴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러나 청춘은 만만치 않았다. 어릴 때부터 주입 받은 나의 무한한 가능성에 대한 믿음은 유한한 현실과 대립하기 시작했다. 나는 되고 싶은 무엇이 될 희망에 부풀어 있었는데, 사회에는 이미 모범 답안이 존재했다. 남들 하는 대로 그렇게 살아가면 될 것이라고 사람들은 말한다. 다수의 의견을 거스르는 도전에는 용기가 필요하고, 그 도전에는 성패에 대한 불확실성이 따라온다.

 

불안정한 미래는 불안을 가져온다. 불안은 나의 봄 하늘 높은 곳으로 올라가 먹구름이 되어 비를 내린다. 비는 바닥을 질척이게 만들고 한치 앞을 분간할 수 없게 만든다. 해답을 찾는 과정은 더욱 고되어 진다. 신발에 빗물이 스미고 바짓단이 젖는다. 날씨가 어둑해지고 잊고 있던 요통이 찾아온다. 나는 이내 축 처져 해답을 찾는 모험을 그만두고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욕구와 갈등한다. 내가 생각한 청춘은 이런 것이 아니었는데, 상상 속 봄과 너무 다른 모습에 속이 상한다. 그러나 내게는 날씨를 바꿀 수 있는 능력이 없기에 그저 비를 맞으며 해답을 찾는 과정을 계속할 수밖에 없다.

 


한 해의 성공적인 농사를 위해서 어느 정도의 봄비는 필요하다고들 한다. 마찬가지로 청춘에도 어느 정도의 비가 도움이 된다. 아버지 세대의 봄에도, 아버지의 아버지 세대의 봄에도 비는 항상 내려 왔다. 미래는 언제나 불안정하고 불확실하기에 불안은 항상 존재할 수밖에 없다. 적당한 불안과 고난은 청춘의 과제를 달성하는데 절실함을 부여하고 더욱 집중할 수 있게 만든다. 그러나 봄비가 늘어나 정도를 지나치고 있다. 사회가 획일화하고 있는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해답이 먹구름을 점점 더 크게 만든다. 답을 찾는 과정을 방해하고 모범 답안을 따르도록 유도한다. 산뜻하고 보송해야 마땅할 봄날의 때 아닌 장마 속에서 청춘들은 점점 더 헤매게 되었다.

 

한국의 봄과 청춘들에게 우기가 찾아왔다. 봄비가 봄철 나의 외출을 묶어두었듯이 청춘에게 내리는 비는 그들 삶의 방식을 제한한다. 사회가 만들어 낸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단선적인 해답은 불안을 생산하고, 그 불안은 새로운 해답을 찾고 선택하는 것을 방해한다. 청춘들은 각자의 멋진 미래를 꿈꿀 수 있는 권리를 빼앗기기 시작했다. 우리는 모두 자신만의 미래를 그리고 싶다. 나는 청춘들이 산뜻한 봄 속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답을 구할 수 있는 세상을 바란다

'사는 일'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국가면 할 일  (0) 2019.03.04
콘센트 자리를 찾는 일  (0) 2019.01.20
소살리토의 중년 여성을 떠올리며  (2) 2019.01.09
떠나는 자, 무엇을 원하는가  (0) 2018.06.15
개그맨이 되고 싶었는데  (0) 2018.04.21

댓글

Designed by JB FAC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