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그맨이 되고 싶었는데


나를 아는 사람들은 조금 놀랄지도 모르겠지만, 내 어릴 적 꿈은 개그맨이었다. 텔레비전 속의 유재석이나 강호동 같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 일고여덟 살쯤 먹었던 내게 아마 거창한 이유라던가 원대한 야망 같은 것은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재치 있는 몇 마디로 브라운관 너머 앉아있는 수많은 사람들의 입가에 미소를 띠게 하는 그들처럼 나도 사람들을 웃게 만들고 싶었다.

 

웃음의 힘은 대단하다. 다들 경험을 통해 알고 있을 것이다. 일단 웃음은 기분을 좋게 한다. 웃음 뒤엔 항상 즐거움이 뒤따라 온다. 게다가 한바탕 웃고 나면 처음 본 사람들과도 벌써 친해진 느낌이 든다. 민감한 이야기를 풀어나가기 앞서 긴장을 풀 때도 짧은 유머만큼 효과적인 것이 없다. 믿거나 말거나 지만 웃음이 암도 예방한다더라. 어린 시절 나는 이렇게 좋은 웃음을 모두에게 나누고 싶었던 모양이다.

 

상대방의 얼굴에 웃는 표정을 만들기 위해 여러 가지 방법을 쓸 수 있다. 어설픈 몸 동작을 지어내거나 스스로 자신을 깎아 내리면, 웃음을 가장한 비웃음을 얻어 낼 수 있다. 누군가의 콤플렉스를 건드려도 웃음은 만들어 진다. 정 안되면 맛깔 나는 욕으로도 웃음을 살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웃음은 누군가의 상처를 숙주 삼아 나온다. 어느 누구 한 명이 상처 받아야만 웃을 수 있다면 그것은 절대 좋은 웃음이 아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웃음을 만드는 방법은 공감을 통해 모두가 미소 지을 수 있는 유머를 하는 것이다. 쉽사리 말로 꺼내 놓지는 못하지만 사실은 모두가 느끼고 있는 감정을 재치 있는 단어들로 포장해 툭 던지면 사람들의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유머를 통해 맞아 맞아하는 공감대를 형성하고 유대감 속에서 기분 좋은 웃음을 지을 수 있다. 비록 몸 개그나 자기 비하 개그에 비해 터져 나오는 웃음 소리는 조금 작을 지도 모르지만, 누구도 상처 받지 않는 착한 웃음이다.

 

내가 감추고 싶었던 감정을 사실은 너도 느끼고 있었음을 깨달았을 때 우리는 안도하고 함께 웃는다. 하지만 그 감정을 꺼내 놓는 과정은 아주 조심스러워야 한다. 어설프게 시도하다가는 그야말로 갑자기 분위기 싸해지는상황에 처할 수도 있다. 개그맨이 꿈이었던 나의 짧은 고찰에 따르면, 매끄러운 공감의 유머를 구사하기 위해서는 세 가지의 능력이 요구되는 것으로 보인다. 첫째는 감추어진 감정을 센스 있는 단어로 포장할 수 있는 재치이다. 우리 모두가 느끼고 있었다 하더라도, 감추어둔 감정을 있는 그대로 내뱉는 것은 단순 폭로에 불과하다. 웃음을 유발하면서도 그 안에 뼈가 있는 유머를 하기 위해서는 타고난 재치가 필요하다. 둘째는 유머가 성공할 수 있는 적절한 순간에 치고 들어갈 수 있는 순발력이다. 아무리 재치 있더라도, 때 지나 뒷북이나 치는 유머에는 웃어주기 힘들다. 마지막 세 번째는 상대방에 대한 세심한 관찰이다. 상대방도 나와 같은 감정을 속안에 숨겨 놓고 있는지 알기 위해서는 그에 대한 관심이 필요하다. 그의 말을 경청하고 표정을 살펴보면서 단서를 잡아낸다. 재치와 순발력이 아무리 뛰어나더라도 세심한 관찰이 뒷받침 되지 않으면 공감의 유머를 할 수 없다.


유머는 컴퓨터와 달라서, 일주일만 무작정 따라 한다고 전유성만큼 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깨달았을 때 나는 개그맨의 꿈을 포기 했다. 관찰을 통해 감추어진 감정을 포착하더라도, 그것을 재치 있는 단어로 포장해서 적절한 순간에 순발력 있게 내뱉는 능력은 쉬이 얻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짧은 순간에 관찰과 재치와 순발력의 능력을 동시에 발휘하는 것은 내게 너무 버거운 일이다. 사람들을 웃게 하고 싶은 욕심에서 나온 성급한 나의 유머는 결국 상대방을 깎아 내리거나 스스로를 비하하는 나쁜 유머가 되기 십상이었다.

 

그래서 나는 유머가 아닌 다른 방법으로 사람들의 얼굴에 미소를 띠게 하고 싶다. 세심한 관찰에 더욱 집중하는 것이다. 사람들의 감추어진 이야기를 찾아 그것을 유머가 아닌 다른 형태로 풀어내고 싶다. 적절한 타이밍에 재치와 함께 치고 들어가는 유머가 아니기에 비록 배를 잡는 웃음을 만들 수는 없겠지만, 그 본질은 별반 다르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내가 느끼는 것을 너도 느낀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터져 나오는 웃음의 본질 말이다. 천천히 여유를 두고 그들의 이야기를 나의 말과 글로 전하면서 고통을 함께 이해하고 나누는 것이다. 나는 그들과 같은 감정을 공유하지 않기에 감히 공감한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그 이해의 과정에서 유대감이 형성되고 그들의 얼굴에 이해의 웃음이 나타날 것이라고 믿는다.

 

유머 대신 그들의 얼굴에 미소를 띠게 하는 일이 구체적으로 어떤 방식일지는 솔직히 아직 잘 모르겠다. 하지만 감추어진 이야기를 갖고 있던 사람들이 내 말과 글을 통해 입가에 자그마한 미소라도 지을 수 있다면, 개그맨이 되지 못한 어린 시절의 한을 조금이나마 달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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