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일 김야매 2020. 1. 5. 17:27
나는 강호동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의 오버스러운 개그 스타일이 싫었다. 강호동보다는 깔끔하고 소탈한 진행의 유재석을 더 좋아했다. 1박 2일보다는 무한도전의 팬이었고, X맨에서는 강팀보단 유팀을 응원했으며, 쿵쿵따를 볼 땐 항상 당하기만 하는 유재석의 편이었다. 개그맨이 장래희망이던 어린 시절에도 나는 강호동을 싫어했다. 강호동 특유의 오버스러움이 나와 맞지 않았다. 오미자차 한 잔에 전기 충격이라도 받은 양 눈꺼풀을 파르르 떠는 것도, 수박 한 쪽 베어 물고 오만상 찌푸리며 오열하는 표정을 짓는 것도 지나치게 느껴졌다. 과장된 그의 몸짓이 가식으로 다가왔다. TV에 1박 2일이 나올때면 나는 주저 없이 채널을 돌렸다. 며칠 전 유튜브로 라면 끓여 먹는 강호동을 보았다. 그는 천왕봉에 홀로 올라 버너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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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일 김야매 2019. 3. 4. 05:56
한국가면 바질을 키울거다. 집 앞 꽃 집에서 씨앗을 사다 바질을 키울거다. 키워서 바질 페스토를 만들어 먹을 거다. 빵에도 발라먹고 파스타도 해먹을 테다. 남은 페스토는 우리 아파트 주민들에게 한 통에 천원씩 받고 팔거다. 앞집 밑집 윗집 모두 바질 페스토로 파스타를 해먹게 만들거다. 그 다음에는 아보카도를 사먹을 거다. 바질 페스토 판 돈으로 사먹을 거다. 조금 덜 익은 단단한 아보카도를 사서 식탁에 올려 놓고 익기를 기다리련다. 물렁하게 익으면 과카몰리를 만들어 먹을 거다. 나초도 찍어 먹고 명란젓이랑 해서 밥에도 비벼먹을란다. 남은 과카몰리는 우리 아파트 주민들에게 한 통에 삼천원씩 받고 팔거다. 바질 씨앗보다는 아보카도가 비싸니까 더 많이 받아도 될거다. 우리 아파트에서 멕시코의 맛이 나게 할거다..
사는 일 김야매 2019. 1. 20. 09:16
집에만 있기가 답답해 간만에 카페로 마실을 나갔다. 따듯한 커피를 한잔 시켜두고, 자리에 느긋하게 앉아 책도 읽고 오랜만에 벼르던 글이나 몇 자 적으려는 요량이었다. 전에 점 찍어두었던 근처 대학교 옆 큰 카페로 향했다. 비가 오던 날이었음에도 카페 안은 학생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어쩌면 비를 피하려 몰려들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노쇠하여 충전 없이는 한 시간을 채 못 버티는 노트북을 위해 콘센트를 쓸 수 있는 자리를 찾아 카페를 빙빙 돌았다. 콘센트 자리는 이미 누군가의 차지였다. 충분히 예상했던 상황이기에 일단 아무 자리나 잡고 콘센트 주변 자리를 주시하기로 했다. 책을 펴들고 읽는 둥 마는 둥하며 그 요주의 자리들을 감시했다. 미국의 카페는 한국보다 콘센트 자리가 적었다. 그럼에도 콘센트를 노리는..
사는 일 김야매 2019. 1. 9. 07:02
샌프란시스코에서 금문교를 건너 가면 있는 조그만 동네 소살리토에 놀러 갔을 때 일이다. 친구와 한국어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해변 옆 산책로를 걷고 있는데 갑자기 누가 봐도 백 퍼센트 한국인의 디엔에이를 몸 속 한껏 장착한 듯한, 아줌마와 할머니의 경계선 즈음에 있는 중년 여성이 말을 걸어왔다. “아유 코리안?” 구수한 말투에서 나는 그녀의 고향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상대의 국적을 내 맘대로 예단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기에 나는 조심스레 영어로 대답했다. 그녀는 반갑다는 듯이 한국어로 말을 걸어오기 시작했다.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잘 기억나지는 않는 걸로 보아 딱히 흥미 있는 이야기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아마 개의 견권(犬權) 이야기를 한참 했던 것 같다. 한국은 아직도 개를 먹느냐는 둥, 그..
사는 일 김야매 2018. 6. 15. 19:38
아직 아무도 마시지 않은 깨끗한 새벽 공기 속으로 담배 연기를 섞는다. 어둑한 아파트 단지 풍경 속으로 뿌옇게 연기 구름이 스며든다. 밤 날씨는 서늘하다. 햇빛이 강하게 내리 쬐어 눈을 찌푸려야 했던 낮이 무색할 정도다. 스산한 공기 속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나를 굽어 내려보던 높은 아파트 불은 모두 꺼졌다. 나는 오롯이 혼자서 건물 사이 사이를 천천히 누빈다. 떠나는 자, 그는 과연 무엇을 원하는가. 이어폰에서 흐르는 노래 가사가 내게 질문을 던진다. 그 질문은 밤 날씨만큼 서늘하다. 예상치 못한 질문은 아니었지만 대답하기에는 영 어눌하다. 처음 떠나보는 것도 아닌데 이번도 머리가 아프다. 시간은 점점 빠르게 흐른다. 달력에 동그라미 쳐놓은 그 날은 점점 내게 다가온다. 별 다른 계획은 없다. 그저 흘..
사는 일 김야매 2018. 5. 12. 18:30
봄비가 늘어날 것이라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한반도의 기후가 온대성에서 아열대성으로 변화함에 따라 ‘우기’가 한국의 봄에서도 나타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과학적 사실이 어떻든 지구온난화가 어떻든 나에게 가장 주요하게 다가온 정보는 봄에 비가 더 많이 온다는 사실이었다. 산뜻하고 보송해야 마땅할 봄이 이제는 습하고 눅눅할 것이라니, 비를 몹시 싫어하는 내게 비극적인 소식이 아닐 수가 없었다. 나는 비가 싫다. 신발에 빗물이 스미고 양말과 바짓단이 젖는 찝찝함이 싫다. 먹구름에 가려 어둑한 날씨가 싫고 잊고 있던 요통이 찾아오는 것이 싫다. 습한 날씨면 나는 축 처지곤 한다. 비가 오는 날은 약속도 모조리 취소하고 집안에 틀어박혀 김광석이나 유재하의 흘러간 가요나 찾아 듣는 것이 좋다. 습한 빗물 속에서 돌..
사는 일 김야매 2018. 4. 21. 22:44
나를 아는 사람들은 조금 놀랄지도 모르겠지만, 내 어릴 적 꿈은 개그맨이었다. 텔레비전 속의 유재석이나 강호동 같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 일고여덟 살쯤 먹었던 내게 아마 거창한 이유라던가 원대한 야망 같은 것은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재치 있는 몇 마디로 브라운관 너머 앉아있는 수많은 사람들의 입가에 미소를 띠게 하는 그들처럼 나도 사람들을 웃게 만들고 싶었다. 웃음의 힘은 대단하다. 다들 경험을 통해 알고 있을 것이다. 일단 웃음은 기분을 좋게 한다. 웃음 뒤엔 항상 즐거움이 뒤따라 온다. 게다가 한바탕 웃고 나면 처음 본 사람들과도 벌써 친해진 느낌이 든다. 민감한 이야기를 풀어나가기 앞서 긴장을 풀 때도 짧은 유머만큼 효과적인 것이 없다. 믿거나 말거나 지만 웃음이 암도 예방한다더라. 어린 시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