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안 보울, 장승배기 - 이주 여성들의 산뜻한 쌀국수
- 비정기 간행물/고메 투어
- 2019. 10. 25. 00:44
장승배기 근처에 볼 일이 있어 들렀다가 간단히 점심을 해결하고자 아시안보울을 찾았습니다. 이주 여성들이 운영하는 쌀국수 전문점이라고 하네요. 몇 년 전에는 티비도 탔었고 장사한지도 나름 꽤 되는 것 같은데 저는 이런 식당이 있는 줄 처음 알았습니다. 장승배기 자주 오지만 대부분 술 먹으러 밤에 오다보니 놓치고 있었던 가게인 모양입니다.
슬슬 날이 추워지니까 쌀국수 생각이 종종 나는 것 같습니다.
자판기가 따로 있습니다. 현금 계산 시 월남쌈 하나가 공짜라길래 냉큼 현금으로 주문했습니다.
자판기가 있지만 다찌석 위주의 식당은 아닙니다. 가게 내부는 꽤 넓고 쾌적한 편입니다. 건물이 낡아보여서 내부도 그렇지 않을까 했는데 잘 꾸며 놓으신듯 합니다.
식당 홈페이지에서 읽었던 대로 이주 여성들이 운영하는 식당입니다. 주방에 계시는 점원분도 서빙을 하는 분도 모두 이주 여성인 것 같습니다. 물론 겉으로만 보고 섣불리 판단해서는 안되겠지만 말을 조금 섞어보니 억양에서 그런 것이 조금은 느껴지는 듯 합니다.
베트남 출신의 셰프가 요리하는 쌀국수라고 하니 기대가 됩니다. 물론 베트남을 가본 적이 없어서 진짜 베트남 쌀국수가 어떤 것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그래도 포메인이나 에머이 같은 쌀국수와는 조금 다른 맛을 내지 않을까 하는 묘한 기대감이 있습니다.
쌀국수가 금새 나왔습니다. 대강 보기에 양이 꽤 많습니다. 어차피 쌀국수니까 따지고 보면 엄청 큰 포만감을 주기는 어렵겠지만 어쨌든 첫 인상은 풍성합니다.
국물을 떠서 맛봤습니다. 제가 알던 한국의 쌀국수들과는 조금 다릅니다. 제가 먹어오던 쌀국수 특유의 달큰한 진함이 조금 덜한 대신 그 빈자리를 레몬그라스(로 추정되는)의 향이 메꾸고 있습니다. 첫 인상은 고기 육수 맛으로 시작하나 뒤는 산뜻한 산미로 맺습니다. 거기에 매콤한 향이 덧붙어 첫 맛과 뒷 맛을 연결합니다. 앗쌀한 맛 덕분에 질리지 않고 끝까지 먹을 수 있는 국물입니다.
다만 모두가 좋아할 수 있는 국물은 아닐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한국인에게는 다소 낯선 산뜻한 향도 그렇고 조금은 가벼운 국물도 그렇고 누구나 행복하게 들이킬 맛은 아닐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세상에 그런 음식이 어디있겠냐만은..
면은 제가 알던 쌀국수보다 좀 더 투명한 느낌입니다. 약간은 납작한 당면같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조금 더 투두둑 끊기는 느낌인데 개인적으로 나쁘지 않았습니다.
면이나 고기 이외에도 숙주와 양파가 들어갑니다. 부드러운 면 식감과 대비를 줄 수 있는 좋은 재료들입니다. 다만 양파의 경우에는 자기들 끼리 엉켜 떼어내 먹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면과 양파와 숙주를 적절한 비율로 함께 먹고 싶었는데, 양파 덩어리에서 양파 쪼가리를 적출해내는 일이 쉽지 않아 그러기 조금 불편했다는 말입니다. 식사 경험의 대세에 지장을 줄 정도는 아니나 조금 아쉬움이 남는 지점이었던 것도 사실인 것 같습니다. 주는대로 대강 처먹는 것도 좋지만 가끔은 이런 소소한 아쉬움을 생각해보는 것도 어찌보면 식사 경험의 일부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생각해보니 쌀국수인데 고수가 나오지 않아서 의아한 마음에 여쭤보니 고수를 따로 주셨습니다. 한국인 입맛에 맞지 않는 고수는 애당초에 음식에서 빼버리고 부탁하면 갖다주는 시스템인 것 같습니다. 향미의 매력이 중요한 이 곳의 쌀국수를 고수 없이 먹었다면 좀 안타까웠을 것입니다. 한국에서 장사하는 만큼 한국 문화와 타협하는 일은 너무나 당연하고 필수적인 것이겠지만, 어찌보면 쌀국수의 심볼이라고 할 수 있을 고수를 포기하는 과정이 주방장 입장에서는 분명 쉽지 않았으리라고 조심스레 생각해봤습니다.
현금거래의 대가로 받은 월남쌈입니다. 채소들의 향이 잘 살아 있습니다. 뒷편의 소스에 찍어 먹으면 고기 없이도 맛의 밸런스가 괜찮습니다. 어차피 끼니는 쌀국수로 때우니까, 이렇게 채소들로 입가심해주는 것도 재미가 있습니다.
다른 쌀국수 집에 비하면 고기가 많이 들어가있지는 않지만, 고기 맛 자체는 훌륭합니다. 면과 함께 먹었을 때 그 효용이 더욱 상승합니다. 국물 자체가 잘 질리지 않아 이런 저런 소스가 테이블에 비치되어있음에도 굳이 뿌려 먹지 않았습니다. 그간 제가 먹어온 쌀국수와 결이 조금 다른 한 그릇이었습니다. 비록 이게 베트남 본토의 맛인지는 모르겠지만, 색다른 개성과 동시에 맛 역시 잡아낸 쌀국수였다는 점은 확실했습니다.
한국 문화로 편입된 이주 여성들이 연 베트남/동남아 식당. 다문화라는 것은 거스를 수 없는 흐름입니다. 문화가 다양해지만 음식 역시 다양해지는 법. 음식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이주민 셰프의 식당을 만날 때 마다 반갑습니다. 예전에 비하면 확실히 이런 식당들이 늘고 있는 듯 합니다. 한국 식문화의 다양성을 위해서라도 이 추세가 더 강하게 계속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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