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맥/더블쿼터파운더치즈, 맥도날드 - 재택근무의 낭만
- 비정기 간행물/패스트푸드 기행
- 2020. 3. 20. 20:35
어릴 적엔 그런 로망이 있었다. 월가의 증권맨마냥 밥 먹을 새 없이 바빠서 한 손에는 햄버거를 들고 남은 손으로는 자판을 두드리며 일하는 그런 로망. 쌍심지가 들어간 눈은 모니터에 고정한채, 손에 든 햄버거는 쳐다보지도 않고 우겨넣으며 정신없이 일하는 직장인에 대한 로망. 이유는 모르겠지만 내게는 그런 로망이 있었다.
놀랍게도 코로나가 그 로망을 실현시켜주었다. 재택 근무로 얻을 수 있었던 최고의 수확이다.
묵직한 더블쿼터파운더치즈 버거를 왼손에 들고 오른손으로는 자판을 두드렸다. 사실 두드렸다고는 할 수 없다. 한 손으로 자판을 두드린다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오른손 검지를 세우고 독수리 타법으로 자판을 콕콕 찍어서 문장을 완성하고 업무를 진행했다. 혹시나 케찹이 키보드에 떨어지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며 소심하게 버거를 먹었다. 모니터를 바라보며 골똘히 고민하는 표정으로 프렌치 프라이를 씹고 싶었지만, 자판을 눌러야 하는 오른손으로 튀김을 집기가 찝찝했다. 노트북을 기름범벅으로 만드는게 좋은 생각 같지는 않았다. 로망이란 로망으로 머무를 때만 아름다운 것이란 사실을 로망을 부수고 나서야 알았다.
재택근무가 길어지자 그래도 다시 한번 햄버거를 주문했다.
로망은 실현됨으로써 더 이상 로망으로 존재할 수 없게 되었지만 어쨌든 로망을 추구하던 관성이 남아있었던 모양인지, 점심시간이 되자 문득 햄버거가 다시 먹고 싶어졌다.
빅맥이 도착했다. 전에 먹을 때 배웠던 것이 있어 업무는 잠깐 멈추고 햄버거에 집중했다. 자판을 콕콕 눌러 찍지도 않았고 케첩을 흘릴까봐 노트북에서도 잔뜩 물러섰으며 오른손으로 감자도 마음껏 집어 먹었다.
이제는 망가져버린 어릴 적의 로망을 떠올렸고, 로망을 떠올리던 어린 나의 모습을 생각했다. 흘러간 로망을 재현하는 일은 흘러간 로망을 추억하는 일이 됐다.
로망이란 일본에서 넘어온 외래어로 한국어로 고쳐 말하면, 낭만이다. 노래 <낭만에 대하여>에서 최백호는 낭만에 대하여 이렇게 말한다.
왠지 한 곳이 비어있는 내 가슴이
잃어버린 것에 대하여
로망이 떠난 자리에 낭만이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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