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주로도 필름이 끊길 수 있다는 사실
- 비정기 간행물/먹고나서 생각하기
- 2020. 9. 4. 22:46
맥주만으로 필름이 끊길 수 있다. 그 사실을 알게된 날은 2014년 4월 16일이었다.
그 날 나는 후쿠오카 행 일본 배에서 밤을 보냈다. 배 한켠에는 온갖 종류의 자판기가 있었다. 자판기는 스낵, 음료는 물론 튀김이나 야끼소바까지 취급했다. 동전을 넣으면 제품이 아니라 요리가 나왔다. 자판기가 즉석으로 조리한 뜨끈한 야끼소바였다. 어쩐지 일본스럽다고 생각했다.
내 동전을 가장 많이 가져간 건 맥주 자판기였다. 500ml 아사히 캔맥주가 아마 200엔쯤 했다. 싸다고 호들갑을 떨며 친구와 열 캔을 넘게 뽑아 먹었다. 인당 열 캔이었다. 맥주 5리터를 족히 먹었으니 기억을 잃을만도 했다.
다음날 눈을 떠보니 선실이었다. 일본인 승무원이 나를 깨웠다. 일본어로 뭐라뭐라했는데 하나도 못 알아들었다. 하지만 승무원의 표정은 아직도 기억난다. 진심으로 안쓰러워하는 표정이었다. 친구와 나는 부랴부랴 입국수속을 했다. 친구는 수속을 밟다가 화장실에 토하러 갔다. 우리는 숙취에 찌든 뇌로 입국심사를 받았다.
전날 맥주를 과하게 먹었던 이유는 딱히 기억나지 않는다. 지금 돌이켜보면 맥주가 그렇게까지 쌌던건 아니었다. 싸긴 했지만 열 캔이나 먹을만큼은 아니었다. 아마 여행을 기념해서 무작정 먹었던 거겠지. 아무튼 그날 배에서의 기억은 잘 안 잊힌다. 물론 필름이 끊겼으니 절반의 기억이지만.
수학여행 가는 고등학생들을 만났다. 풍랑이 커서 갑판으로 나갈 수 없었다. 실내 테이블에서 맥주를 마시는데 어슬렁대는 시선이 느껴졌다. 도무지 왜 그랬는지 아직도 알 수 없는데 친구가 고등학생들을 불렀다. 앉아서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는 모르겠다. 영양가 없는 이야기였을거다.
깊게 남은 기억은 이거다. 테이블에 고등학생을 앉혀놓은 친구가 화장실에 가버렸다. 나는 초면인 고등학생 둘과 마주봤다. 마주친 시선을 타고 어색한 기류가 흘렀다. 아무 말도 건내지 않았다. 나는 그때 그 날 있었던 뉴스를 떠올리고 있었다. 그 묘한 침묵이 아직도 종종 생각난다. 세월호란 단어를 들으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다. 그때 그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곧 학생들을 돌려보냈다. 친구와 나는 실없는 농담을 하며 맥주 캔을 계속 비웠다. 흔들리는 배 위에서 화장실을 몇 번이고 들락날락했다. 그리고 자판기에서 차갑게 식은 맥주를 또 뽑아 마셨다. 배는 후쿠오카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나는 곧 기억을 잃었다. 4월 16일의 바다였다.
* 사족 하나, 그때 일본 배에서 찍은 사진을 찾으려고 클라우드를 뒤졌다. 갤럭시를 쓰던 때니 iCloud는 아닐테고, 구글포토와 네이버 클라우드를 몽땅 찾아봤는데 사진이 없다. 딱 여행 날부터 한달 동안의 기록이 없다. 페이스북에서 필터 잔뜩 낀 사진 한 장 간신히 건졌다. 후쿠오카 선착장인듯 하다. 덕분에 추억여행 원없이 했다.
* 사족 둘, 사진을 찾을 수 없어 아사히 캔맥주 사진을 쓰려했다. '노노 재팬'이 벌써 코로나19 전의 일이다. 이쯤되면 다시 편의점에 들어왔을 줄 알았다. 애당초에 편의점에서 아사히가 쫓겨난 줄도 몰랐다. 동네 편의점과 마트 서너곳을 돌았지만 아사히는 물론 일본 맥주를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다른 건 잘 팔던데 아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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