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인과 할머니가 공존하는 길거리의 커피집

“가게에 모자란데가 없는데 딱 하나, 화장실이 없네요”, 사장님이 말했다. 이태원 골목을 따라 구비구비 산책하다 우연히 찾은 카페에서였다. 와이파이도 없고 테이블도 ‘테이블’이라 적힌 의자가 대신하고 있었지만 사장님은 자신의 카페를 그렇게 소개했다. 

 

간만에 친구와 이태원에 왔다. 나는 백수고 친구는 휴가 중이어서 평일 점심에 만났다. 점찍어둔 가게서 피자를 먹고 나니 할게 없었다. 언덕길을 따라 산책을 하기로 했다. 목적지는 정하지 않았다. 일단 올라가며 생각해보기로 했다.

 

언덕을 오를수록 한글 간판의 비율이 점점 줄었다. 어떻게 각도를 잘 틀어서 사진을 찍으면 터키라고 해도 믿을 것 같았다. 이곳이 한때 힙했던 우사단길이라고 했다. 마트에선 외국 식품을 팔았고 골목 사이사이에선 외국인들이 쭈구린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조금 더 높이 올라가보기로 했다. 보이는 대로 경사 급한 계단을 몇 번 오르고 나니 다시 한글 간판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곳의 주요 주민은 어르신들이었다. 조그만 마트용 수레를 끄는 할머니들이 천천히 거닐고 계셨다. 고개를 들어 도로명주소판을 봤다. 여전히 우사단길이었다. 

 

문득 화장실이 가고 싶었다. 아직 언덕길 한복판이었다. 근방에 카페가 보였다. 가게 앞에서 힙한 옷차림과 함께 수염을 잔뜩 기른 손님들이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동네 주민은 아닌 것 같았다. 언덕배기까지 온 힙스터라. 그렇다면 커피가 맛있을 것이 분명했다. 화장실도 들릴겸 미닫이 문을 넘어 가게에 입장했다. 가게는 좁고 어수선했다.

 

일단 주문부터 하기로 했다. 메뉴판을 들여다보고 있으니 덩치 큰 사장님이 다가와 자세히 설명해준다. 본인이 내리는 커피에 대한 자부심이 느껴졌다. 메뉴판에 있는 모든 메뉴를 설명하고 나서야 주문을 받았다. 중간에 ‘테이블’이라 적힌 의자에 앉은 손님을 혼내느라 한번 설명을 끊긴 했지만 흥미로운 설명이었다. 

 

나는 가게와 같은 이름을 가진 시그니처 커피를 주문했다. 커피를 기다리며 화장실을 물었다가 첫 문장의 대답을 들었다. 화장실이 없는 카페라니. 하긴 와이파이와 테이블도 없다. 그 공백을 사장님의 자부심이 메우고 있었다. 주변에 개방화장실이 없는지 찾아보다가 포기했다. 사장님은 못내 미안했는지 커피를 가져다 줄때도 화장실이 없다고 넋두리 했다. 

 

커피가 나왔다. 사장님은 테이블 대신 비치된 ‘테이블’이라 적힌 의자 위에 커피를 올려 놓았다. 그리고선 우리 눈높이에 맞춰 무릎을 꿇고 커피를 어떻게 마셔야 맛있는지를 설명했다. 내용이 방대해서 다 기억은 안나는데 아무튼 먹을수록 맛이 점점 변한다는 식이었다.

 

사장님이 설명할 때 검지 손가락의 상처에 눈길이 갔다. 일부러 본 건 아닌데 보였다. 촘촘히 들어선 길게 패인 자국이 벌집모양을 이루고 있었다. 어쩌다 그랬는지는 물어보지 않았다. 실례일까봐 못본 척 했다. 커피를 만들다 생긴 영광의 상처인지 집에서 된장찌개 채소를 손질하다 베인 것인지 나로서는 알 방법이 없었다. 사실 방법이 있다해도 굳이 알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다만,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다. 테이블과 화장실의 부재도, 친절한듯 불친절한 접객도, 커피와 공간에 대한 강한 자부심도, 무엇보다 외국어 간판과 할머니의 미니 수레가 공존하는 이곳을 터로 삼은 공간 선정도 흔한 건 아니었다. 보통이 아닌 동네에 보통이 아닌 사람이 운영하는 커피집이었다. 

 

커피맛도 보통이 아니었다. 라떼였는데 언덕을 올라와 먹을만한 가치가 있었다. 하긴 화장실과 와이파이는 없어도 설명에 그만큼 공을 들이는 커피가 맛없을리가 없다. 야외에 앉아 길거리를 구경하며 커피를 마저 마셨다. 외국인과 할머니가 같은 아스팔트를 공유하고 있었다. 커피를 모두 마신 나는 다시 우사단길을 따라 이태원역으로 되돌아갔다. 화장실은 이태원역에서야 쓸 수 있었다. 

댓글

Designed by JB FAC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