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가격리 식사일기, 10일차 - 지루함과 공존하기

자가격리로 집 밖에 나가지 못하면 할 것이 그리 많지 않다. 방 안에 내가 자리 잡을만한 곳이라곤 침대와 책상 의자 밖에 없는데, 그래서 하루 내내 그 두 곳만을 왔다갔다 한다. 책상에 앉아 영화를 좀 보고 책을 읽다가 침대로가 마저 책을 읽고 영화를 본다. 그러다 그마저도 질리면 이상의 소설 <날개>의 주인공처럼 이불 속에 들어가 온갖 것을 머리로 연구하곤 한다. 코로나에 대한 연구, 내일 먹을 배달 음식에 대한 연구, 왜 이런 일이 우리 집에 일어났는가에 대한 연구, 세상 모든 삼라만상에 대한 연구까지. 이 이불 속 연구들은 내 머리 바깥으로 발표될 수 없는 것들이기에 나는 지루하다. 

 

오늘 아침은 로아커 웨하스에 커피 한 잔. 학교 다닐땐 이 조합으로 끼니를 종종 때우곤 했다. 딱히 이유는 없었지만 로아커와 함께 마실 땐 아이스보단 따뜻한 커피를 택하곤 했는데, 오늘 아이스 커피와 먹어보니 역시 로아커는 따뜻한 커피와 함께 먹는 것이 좋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로아커는 고오급형 웨하스. 양도 적절해서 딱 물릴 때쯤 마지막 조각을 먹을 수 있다.

 

오늘은 이상하게 입맛이 없는 날이었다. 점심에 뭘 먹을지 한참 고민하다가 결국 밥에 참치와 마요네즈, 후리카케를 먹고 대강 비벼 먹었다. 

 

밥그릇도 너무 넓직하고 이렇게 보니 개밥을 연상시켜 비주얼이 그리 좋아보이지는 않는데, 일단 비벼 놓고나면 누가봐도 영락없는 개밥이다. 그래도 맛은 좋음

 

점심을 먹고 나니 기분이 약간 좋아져서, 일단 기분이 좋아진 김에 더 기분 좋아지기 위해 얼음콜라를 한잔했다. 기분 탓인지 오늘 콜라는 탄산이 다소 약한 듯한 느낌.

 

침대에서 닝기적대다가 저녁으로는 멕시코 음식을 시켜먹었다. 격리 초반부터 언제 시켜 먹을까 벼르고 있었던 것인데 드디어 오늘 소원 성취했다. 좌측은 타키토스, 우측은 타코. 

 

내가 먹을 메뉴로는 비프 멕시칸보울(좌측)을 준비했다. 그리고 칩들을 찍어먹을 과카몰레(하단)도 추가 주문했고, 우측의 타키토스는 가족들에게 하나 씩 나눠 준 후 남은 것을 가져왔다. 

 

멕시칸 보울은 생각보다 맛있었다. 타코벨스타일과 LA에서 먹었던 멕시칸 스타일을 적절히 짬뽕해낸 느낌. 카옌페퍼로 추정되는 멕시칸 향신료에 멕시코 콩인 핀토, 고수, 과카몰레까지 들어있으니 충분히 멕시칸스러운 맛. 그런데 먹다 보니 은근히 매워서 땀 좀 흘렸다.  

 

매워서 고통스러운 입에 어제 먹다 남은 미쯔를 들이부었더니 놀라우리만큼 빠르게 진정됐다. 매운 맛 잡는데는 물이나 우유보단 미쯔가 직빵이다. 이렇게 생활의 지혜를 하나 배워가는 것. 

 

하루를 일찍 마무리하고 잘까 싶은 시점에 아빠가 주문한 회가 도착했다. 진짜 간단한 안주가 필요했던 것인데 생각보다 이것저것 푸짐하게 사이드 요리가 왔다.

 

나도 삘 꽂혀서 집에 있던 고량주 한 잔하고 자기로 했다. 양하대곡이란 이름의 고량주인데 집에 두고 한참 동안 먹지 않았던 것이다. 어제 브랜디도 그렇고 집에만 있으니 안 먹던 술들을 하나 둘 씩 까게 되는 듯. 이럴 줄 알았으면 와인이나 좀 많이 쟁여 놓을 껄 그랬다. 

고량주 맛은 달착하고 나쁘지 않은데 뒷맛에 소똥향과 지푸라기향을 섞어 놓은 듯한 고릿한 향이 난다. 이게 누룩향인가. 먹다 보니 마냥 나쁜건 아닌거같기도하고, 익숙해지면 즐길 수도 있을 법도 한데 아직 나는 잘 모르겠다. 

 

연어와 우럭. 우럭도 꽤 괜찮지만 연어가 생각보다 맛있다. 기름기도 충분하고 두껍게 잘라내 식감도 좋다. 

 

삘 꽂혀서 서비스로 따라왔던 타코야끼도 먹기로 했다. 요건 고량주랑 참 궁합이 잘 맞는 안주. 뜬금없는 혼술에 급 텐션 올라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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