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년 만에 해먹은 <아메리칸 셰프>의 그 파슬리 파스타

오랫동안 벼르던 요리가 있다. <아메리칸 셰프>에서 주인공이 스칼렛 요한슨에게 해줬던 바로 그 알리오 올리오. 올리브 오일에 마늘을 달달 볶다가 잘 삶은 면과 신선한 파슬리를 잔뜩 넣고 레몬을 뿌려 마무리하는 파스타다. 군대에 있을때, 그러니까 거의 5년 전에 본 영화인데도 이 파스타를 요리하는 장면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게 남아있다. 

 

바로 이 파스타

알리오 올리오는 자주 해먹지만 <아메리칸 셰프>의 그 알리오 올리오는 시도해보지 못했다. 가장 큰 이유는 바로 파슬리였다. 구하기가 쉽지 않은 재료다. 게다가 그냥 파슬리는 쓴맛이 있어서 안되고, 반드시 이탈리안 파슬리를 써야한다. 그러나 알다시피 이름이 외래어로 된 서양 채소라면 어지간한 동네 마트에선 찾아볼 수 없다. 이탈리안 파슬리는커녕 그냥 파슬리 구경도 어렵다. 

 

그래서 쿠팡의 신선식품 배송 서비스도 알아본 적 있다. 쿠팡에선 다행히 이탈리안 파슬리를 취급한다. 그런데 이번엔 가격이 너무 저렴한 것이 걸린다. 품질에 문제가 있을까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내게 필요한 파슬리는 딱 2,000원 어치라는 데에 문제가 있었다. 배달을 받으려면 최소주문비용을 맞춰야 하는데, 그러려면 파슬리 한 움큼 사자고 먹지도 않을 식료품을 과잉구매하는 셈이다. 

 

사실 언젠가 한번은 최소 비용 맞춰 구매 직전까지 갔으나, 마침 장바구니의 물건 하나가 매진되어 그냥 주문을 포기했다. 다른 물건으로 금액을 맞추면 됐겠지만 뭐랄까, 김이 새버렸다. 나는 아무래도 이탈리안 파슬리와는 인연이 없나보다, 그렇게 생각하고 넘어가기로 했다. 어차피 지금껏 이탈리안 파슬리 없이도 파스타는 잘 해먹었으니까. 

 

하단 좌중앙의 이태리파세리, 국내산이다

코로나가 도무지 사그라들지 않는 요즘이다. 어쩌다 외출을 하면 일부러라도 백화점 식품 코너에 들린다. 온갖 채소와 육류가 가득한 그곳에서 카드를 돌도끼처럼 꼬나쥐고 재료 사냥에 나서는 것이다. 기왕 집에 유폐된 김에 그간 해보고 싶던 요리를 몽땅 해보자는 생각이다. 그러던 와중, 이탈리안 파슬리가 레이더에 걸렸다. 

 

수증기 내리는 오픈형 진열냉장고 속 2,000원짜리 150g 이탈리안 파슬리. 깔끔한 플라스틱 용기 포장. 모르긴 몰라도 신선해 보이는 상큼한 초록 색감. 아아, 내가 찾던 바로 그 파슬리. 한 치의 고민 없이 낚아챘다. 오랜 헤맴 끝에 열대과일을 기어코 발견한 원시인의 기분이 이랬을까. 나는 기쁜 마음으로 H식품관 글씨가 박힌 플라스틱 채집통에 파슬리를 던져넣었다. 

 

다음날 아침, 설레는 마음으로 스칼렛 요한슨이 먹었던 바로 그 알리오올리오를 준비했다. 그러고보니 집에 레몬도 없어서 아침 9시부터 마트에 다녀왔다. 집 앞 마트는 10시 오픈이라 집 앞앞 마트까지 가야했다. 아무튼 모든 준비가 완료됐다. <아메리칸 셰프>의 주인공이 제작한 <더 셰프쇼>를 시청하며 다시 레시피를 복기한 후, 드디어, 요리에 돌입했다. 

 

일단 파스타 면을 끓는 물에 넣는다. 마늘은 얇게 편을 썰면 좋으나 귀찮으면 대강 으깬다. 팬에 올리브오일을 조금 많다 싶을 정도로 넣고 아주 약한 불에서 마늘을 볶는다. 기분 좋은 마늘향을 기름에 최대한 배게 하는 것이 목표니 마늘에 색이 나지 않도록 불조절에 유의한다.  크러시드 페퍼도 함께 볶는다. 맵고 빨간 가루라면 무엇이든 상관없으나 오래 볶으면 탈 수 있으니 마늘보다 늦게 넣는다. 

 

이탈리안 파슬리는 굵은 줄기만 떼어내고 이파리는 거칠게 다져서 준비한다. 면이 다 익을때까지 파슬리의 상쾌한 향을 음미한다. 면이 다 익으면 마늘기름에 면을 투하하고 면수를 조금 붓는다. 젓가락이나 주걱이나 집게로 면을 사정없이 괴롭힌다. 전분을 뽑아내어 소스*를 걸쭉하게 만드는 과정이니 폭탄테러범을 고문수사하는 것처럼 가혹하게 다뤄도 좋다. 이 과정에서 버터를 넣어주면 맛이 한결 풍부해진다. 어느 정도 소스가 걸쭉해졌다면** 다진 파슬리를 잔뜩 넣고 잘 섞는다. 레몬을 적당량 짜넣어 마무리하고 아무 그릇에나 적절히 플레이팅한다.*** 그리고 먹는다. 

 

플레이팅은 실패했는데 암튼 맛있었음

파릇한 파슬리 향을 맘껏 즐기며 슥슥 면을 돌돌 말아 입에 넣는다. 이탈리안 파슬리가 품고 있는—안 품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이름에서 오는 플라시보 효과로서의—이탈리아의 이국적인 향을 입안 한가득 즐겨보는 것이다. 혹여나 흔한 풀냄새라고 생각이 든다면, 내가 얼마나 오랫동안 이 파스타를 염원해왔는지를 다시 떠올려본다. 쉰내나는 군대 생활관에서 <아메리칸 셰프>를 처음 봤던 때부터 백화점 식품코너에서 기어코 구한 신선한 파슬리로 만든 파스타를 입에 넣고 있는 지금까지 그 사이의 5년이 영화 필름처럼 지나간다. 이것은 절대 흔한 풀냄새가 아니다. 5년의 기대감과 기다림을 품고 있는 이탈리안 파슬리의 파릇하고 상쾌한 향이다.

 


*알리오 올리오 같은 오일 파스타에서 소스란 오일과 면수가 섞인 것을 말한다. 일반적으로 물과 기름은 섞일 수 없지만 전분이 둘 사이에 개입하면 섞일 수 있다. 물과 기름이 섞이면 걸쭉해서 소스라고 부를만한 것이 된다. 

 

**안 걸쭉해지고 기름이 흥건히 남았다면 아마 면수를 덜 부었거나 면을 덜 괴롭혔을 공산이 크다. 아쉽지만 다음 기회를 기약한다. 왜냐면 그냥 먹어도 먹을만하기 때문. 근데 걸쭉하게 만든답시고 계속 끓이다가 면이 퍼지면 돌이킬 수 없다. 아니면 경성치즈를 좀 갈아 넣는 것도 방법.

 

***물론 이 레시피를 보고 따라할 사람은 없겠지만, 있다면 굳이 그러지 않기를 조언한다. 나말고 진짜 전문가들이 유튜브와 웹상에 레시피 이미 엄청 많이 올려놨기 때문이다. 아래 첨부한 링크는 <아메리칸 셰프>의 감독이자 주연 배우인 존 파브로가 영화의 요리 자문을 맡았던 로이 최 셰프와 함께 직접 제작한 요리 프로그램 <더 셰프 쇼>에서 소개한 레시피다.

 

 

Aglio E Olio Recipe — The Chef Show

Full recipe and steps for Scarlett Johansson's Pasta Aglio E Olio from The Chef Show on Netflix.

thechefshow.com

그리고 그냥 올려보는 재료들의 모습들

처음 파슬리 샀을때는 너무 반가워서 사진도 못 찍었다. 이건 블로그에 쓰려고 나중에 다시 식품관 갔을 때 찍은 사진. 막상 본문에는 안 썼네

 

아침부터 사러나갔던 레몬. 아직도 다 못 처리 못했다.

 

파슬리 손질 전.

 

요리 중간의 모습. 

댓글

Designed by JB FAC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