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일 순대국] 한양대역/왕십리 - 추억의 맛 순대국
- 비정기 간행물/고메 투어
- 2019. 9. 25. 22:07
대학 생활도 드디어 마지막 학기를 맞았습니다. 입학한지 햇수로 벌써 8년째이니 이제 졸업할 때가 되긴 했습니다. 8년 간 왕십리를 꾸준히 다녔습니다. 술도 많이 마시고 밥도 많이 먹었습니다. 자연스레 왕십리에도 마음이 가는 음식점들이 생겼습니다. 아마 근 8년간은 그 어느 곳 보다 음식을 많이 사 먹은 동네니까요. 마지막 학기를 맞아, 대학 생활을 마무리도 할겸 그간 제가 애정했던 식당들을 돌아보는 것도 의미 있겠다 생각했습니다. 물론 사라진 식당도 많고 맛이 변한 곳도 있지만 여전한 식당들도 있습니다. 그 위주로 몇 군데 포스팅해보려합니다. 뭐 얼마나 될지는 아직 감이 안오네요. 어쨌든 그 첫번째 타자는 <성일 순대국>입니다.
가을 학기의 시작무렵에는 날씨가 참 좋습니다. 노상까지 좋은 날씨입니다. 예전 같으면 대강 벤치에 앉아서 막걸리 한잔 했을텐데, 이제 같이 술 한잔할 만한 친구들은 이미 다 취업해버리고, 저만 혼자 비탈길을 내려가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마음이 허합니다. 마음이 허한 날에는 속이라도 든든해야겠지요. 그때마다 생각나는 식당, 성일 순대국으로 향합니다.
한양대 정문—정문이랄 것도 없는 그냥 길이지만—에서 병원방향으로 빠져나와 베스킨라빈스가 있는 블럭으로 길을 건너면, 아주 꼬릿한 냄새가 나는 좁은 골목길이 있습니다. 나름 지름길이라 아는 사람은 잘 다니지만, 모르는 사람은 냄새도 그렇고 음침한 길이기에 들어가볼 생각도 안하는 골목입니다. 아무튼 그 골목안에 성일순대국이 있습니다. 돼지 육수내는 꼬릿한 향이 골목을 지배합니다.
좌석은 철푸덕 좌식이구요, 규모는 그다지 크지 않으나 먹을게 많은 왕십리 상권 상 웨이팅이 걸릴 일은 없습니다. 점심시간에는 사람들이 가득차는 날도 있긴 합니다. 그럴땐 아쉬움없이 다른 거 먹으러 가면 됩니다. 어차피 날이면 날마다 오는 왕십리이기에.
메뉴판은 최근에 한 번 갈으신 모양입니다. 대강 보니 도배도 최근에 새로 하신듯. 마무리가 깔끔하게 된 것 같지는 않지만 뭐 학교 앞 순대국집 바이브가 그런거 아니겠습니까.
밑반찬으로 깔리는 깍두기, 김치, 양파, 고추, 다친고추, 쌈장, 새우젓입니다. 국밥집을 판단하는 첫 요소인 깍두기와 김치는 맛이 좋습니다. 사실 제 기억으로는 깍두기가 더 맛있었던 것 같은데, 이날은 김치가 더 맛있었습니다. 양파, 고추, 쌈장은 손도 안댔고, 새우젓은 간맞추는데 썼습니다. 6000원짜리 순대국먹는데 밑반찬 접시만 6개라니.. 항상 느끼는 거지만 비효율적인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차라리 우리 이런이런 반찬 있으니까 먹을거 고르면 갖다주는 식이 어떨지 싶습니다. 밑반찬에 대한 제 생각은 또 다른 포스팅에서 이야기 할 날이 있겠지요.
팔팔 끓는 순대국이 나왔습니다. 팔팔 끓고 있기에 한참을 식혀먹어야 합니다. 이 집 순대국을 참 오래 먹어왔지만, 단 한번도 입을 데지 않은 채 식당 문을 나선적이 없습니다. 그만큼 뜨거운 순대국.
순대국이지만 순대는 몇 개 없습니다. 그나마도 당면순대. 대신 돼지 부속이 아주 잔뜩 들어있습니다. 순대가 먹고 싶어서 순대국을 먹는게 아니라면 실망할 일은 없을 정도로 건더기가 실합니다. 사실상 순대국이라기보다는 돼지부속국.
이 집 순대국의 가장 큰 장점이라면 아주 진한 국물입니다. 진하디 진한 국물. 한그릇 먹고 나면 든든하고 허하던 몸과 마음이 튼튼해지는 그런 국물입니다. 다만 간은 전혀 되지 않은 상태로 나옵니다. 알아서 맞춰먹는 시스템.
이곳에서는 간 맞추는 용으로 다데기와 소금, 들깨 그리고 아까 밑반찬으로 나왔던 새우젓을 줍니다. 새우젓은 고기 찍어먹어도 되고 새우 한마리씩 집어서 밥과 함께 먹어도 되고 취향껏 먹으면 되겠습니다.
간 맞추기는 물론 취향따라 다르겠지만, 저 같은 경우는 새우젓을 베이스로, 다데기는 보조로 맞추는 편입니다. 소금은 일체 넣지 않는 편입니다.
그런데 이번 방문에 보니, 다데기와 소금에 있던 전용 스푼이 사라졌습니다. 제 테이블만 그런건가 했더니 그냥 가게 전체 양념통에서 전용 미니 스푼을 다 치워버린 것 같습니다. 아마 전용 스푼이 있는 쪽이 위생상 더 좋지 않다고 판단하신 듯합니다. 과연 그 판단이 옳은 것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찝찝한 마음을 안고, 수저통에서 새 스푼을 꺼내서 최대한 남들 숟가락이 닿지 않았을만한 면을 떠서 순대국에 투하했습니다. 제발 순대국물에 담근 수저로 공용 다데기를 뜬 사람이 없기를 바라면서.. 설마 입에 넣었던 숟가락으로 다데기를 뜨는 미개한 사람이 아직도 한국에 남아있지는 않을 것이라 믿으면서..
다행히 들깨는 또 전용 수저가 남아있습니다. 들깨야 말로 소위 '더블딥', 즉 입에 넣었던 숟가락으로 펐다가는 들깨통 전체가 아작이 나기에, 아무리 부주의한 사람이라도 그런 짓은 하지 않을거라고 사장님은 생각하신 모양입니다.
관리 잘되고 있는 공용 양념통을 만나도 찝찝한 기분인데, 전용 수저마저 없는 다데기를 보니 기분이 조금 착잡해졌습니다. 제가 지나치게 예민한 걸 수도 있겠지만, 한국 식문화가 전체적으로 지나치게 위생에 둔감한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어쨌든 그런 생각을 하면서 간을 다 맞췄습니다. 오늘의 간 컨셉은 건강하게 였습니다. 평소보다 간을 좀 덜 맞춘채 먹었습니다. 진한 국물 맛에 집중하고 싶었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식사뿐. 간을 아주 긴 호흡으로 맞춰냈기에 순대국은 먹을 수 있을 정도로 식었습니다. 물론 그래도 입은 다 데였습니다. 입 데는 거 정도야 순대국 식사 경험의 일부라 생각하고 그냥 감수하는 편입니다. 사실 제가 음식을 좀 빨리 먹는 편이라서 항상 데는 것 같지만 아무튼.
순대국은 여전히 진합니다. 가게 근처에서 진동하는 그 꼬릿한 향의 결정체가 이 국물안에 다 녹아있습니다. 먹다보면 입술이 기름으로 다 코팅돼 찐득해집니다. 국물이 진하다는 증거겠지요. 이곳 순대국은 그런 맛에 먹습니다. 몸과 마음이 허할때는 자연스레 머리 속에 떠오르는 그런 맛입니다.
오랫만의 방문이었습니다. 거의 1년 반 정도만에 찾은 것입니다. 그 사이 제가 예민해져서 그런지 예전에는 보이지 않던 불편한 요소들이 조금씩 눈에 들어오네요. 그렇다고 이제 다시 찾아오지 않을 것이냐? 그렇지는 않습니다. 아마 헛헛한 날이 오면 또 찾게 되겠지요. 이 순대국집에는 그냥 국물 이상의 것이 녹아있습니다. 8년전부터 정기적으로 찾아가던 곳입니다. 찾아갈때마다 달랐을 제 다양한 감정과 생각들이 자연히 거기 녹아들었겠죠. 이 식당을 찾는 학생이 저 뿐이었을까요. 아마 수백수천명의 대학생활이 녹아있는 국물일겁니다. 이 가게에 추억이 없는 사람이라면 맛볼 수 없는 그 맛, 저는 그 맛 때문에 성일 순대국을 찾았고, 아마도 앞으로 또 찾게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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