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가격리 식사일기, 3일차 - 격리 생활 적응 중

3일차의 아침에는 오랜만에 늦잠을 잤다. 몸이 격리 생활에 조금 적응한건지 아님 긴장이 풀리고 맘에 안정을 찾아서 그런건지, 컨디션도 점점 돌아오고 있다. 남은 열흘 가량을 어떻게 해야 알차게 보낼 수 있을지를 슬슬 고민해볼 때인듯 하다. 

 

전날 쿠팡에서 주문한 콜드브루 원액이 도착했다. 느즈막히 일어나서 시원하게 커피 한 잔 때리고 하루를 시작할 생각. 

 

냉동고에 여름 쯤 얼려둔 얼음이 아직 남아있어서 뼛속까지 시원해지는 아이스 커피를 마실 수 있었다. 달지도 않고 탄내가 강하지도 않아 딱 적당한 커피. 물에 조금씩 타마시면 꽤 오래 마실 수 있을 듯하다. 나쁘지 않은 소비였다.

 

배는 고픈데 딱히 먹을게 없다. 사실 먹을 건 많은데 먹고 싶은게 없다. 그나마 간편하게 먹기 좋은 스팸을 먹을까 했는데 마침 똑 떨어져서 대신 리챔을 꺼내들었다. 여담으로 구호물품에도 프레스햄이 있긴했다. 하지만 닭고기를 섞은 런천미트다. 큰 걸로 네 통쯤 보내준 듯한데 아마 그 런천미트들은 아마 오랫동안 집에서 푹 숙성될 것 같다는 예감이다.

 

간편하게 에어프라이어에 조리하기로 했다. 예열없이 넣고 180도 12분 돌려줬다. 좀 더 큰 사이즈 돌릴땐 15분+알파를 돌려주면 된다. 중간에 한번 뒤집어 주는 센스도 겸비하면 좋다.

 

자가격리의 몇 안되는 장점 중 하나는 분리수거를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어차피 저 폐기물 봉투에 들어가는 쓰레기들은 전부 일반 쓰레기 행이기 때문. 버릴 것 있으면 그냥 다 저기 주황비닐에 때려 박으면 된다. 편하다. 지구야 미안해..

 

적당히 익어나온 리챔. 김치 좀 덜고 김도 챙겨서 다시 방으로 돌아간다.

 

어제 보던 타코 다큐를 마저 보며 먹었다. 아침 식단 이 정도면 사실상 호텔 조식 부럽지 않다.(한국인 한정) 

 

흰쌀밥에 스팸김치김 조합은 클래식 중에 클래식. 스팸이 아니라 리챔이라는 것이 단 하나 옥의티.

그러나 리챔 맛이 스팸에 비해 딱히 열등하다는 건 아니고 사람마다 취향 차이에 따라 호불호가 갈리지 않겠나 싶다. 나는 리챔보단 스팸 편. 

 

방에서 홀로 웹서핑을 하고 있는데 아빠가 뜬금없이 맥주를 배급해줬다. 아마 드시고 싶었는데 혼자 먹기엔 뭐해서 나눠주신듯. 안주는 할라피뇨 소시지를 에어프라이어에 돌린 것.

 

와 집에 이런 컵이 있었네

차갑게 잘 식힌 맥주는 기가 막히다. 진부한 표현이지만 그야말로 목젖까지 시원한 맛. 게다가 격리 중에 마시니 차가운 맥주가 답답한 속을 뻥 뚫고 내려가는 듯하다. 어째 <도박묵시록 카이지>의 지하노역소에 갇혀있다가 맥주 마시는 명장면이 떠오른다.

 

이미 건더기 다 건져가서 비주얼이 이상한 것

일단 음성 판정은 받았지만 남은 가족 중 누가 언제 증상이 나타날지 모르기 때문에, 격리 초반에는 요리를 가능한 꺼리기로 했다. 주방에 있는 시간도 줄이고 식기류를 통한 간접 접촉까지 막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뜨끈한 국물이 먹고 싶단 요청도 있었고 오늘 쿠팡에서 계란 배송도 왔겠다, 잽싸고 조심스레 계란국을 야매로 끓여봤다. 요리장갑도 끼고 하니 요 정도 간단한 요리 정도라면 괜찮을 성싶다.

물에 건새우를 넣고 충분히 팔팔 끓여 국물을 내고 거기에 쪽파 조금과 계란 푼 물을 넣어 완성했다. 그리고 비밀이지만 다시다를 몰래 쬐끔 넣었더니, 먹을만한 계란국이 나왔다. 총 요리시간 10분도 안되지만 맛은 충분했다. 시간 가성비가 좋았던 요리.

 

막상 끓여놓고 나니 나는 딱히 안땡겨서 진짜 먹을만큼만 떠서 먹었다. 

 

생각없이 냄비 너무 큰 거 썼음

그리고는 내일 아침용 계란을 준비했다. 라멘집에서 흔히 토핑으로 내는 계란인 아지타마고를 해볼 작정. 별건 없고 반숙으로 삶은 삶은 달걀 껍질까서 간장에 몇 시간 담가놓으면 된다. 반숙으로 삶는 건 이게 태어나서 두번째라 잘 될지 모르겠다. 6분 30초를 삶았다.

 

한 알은 넣다가 깨져버려서 스크램블 에그로 급 전환했다. 버터 조금 넣고 약불에 슥슥 섞어낸 간단한 스크램블 에그. 어차피 달걀 삶는 6분 동안 할 것도 없어서 심심풀이 땅콩 마냥 먹었다.

 

다 삶은 계란은 껍질까서 간장, 물, 설탕, 다시다 믹스에 담가 놓았다. 근데 완숙란과 달리 반숙란은 껍질까기가 어려웠다. 중간에 하나 터져서 그건 그냥 그 자리에서 먹었다. 그래도 다행히 완벽한 반숙으로 조리되기는 했더라.

 

냉장고에 넣어두었다. 내일 아침으로 먹을 예정이다. 은근히 기대된다. 하긴 이렇게 소소한 기다림이라도 있어야 지루한 격리 생활도 나름 즐겁게 보낼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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