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당, 서울대입구역 - 분위기가 만드는 덮밥의 맛

눈 대신 비가 부슬부슬 내리던 어느 겨울날 저녁, 간단한 식사를 위해 서울대입구역 주변의 한 덮밥집을 찾았습니다. 잔잔한 분위기에서 혼밥하기 좋다는 평은 오래 전부터 들었으나 직접 방문하기로는 처음입니다. 동행자와 함께 얇은 빗방울을 헤치고 덮밥 전문점 '지구당'에 도착했습니다. 

 

서울대입구역에서부터 10분 안쪽의 거리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비 오는 날이라 유독 멀게 느껴졌던 것 같아요. 소위 '샤로수길'과는 동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월, 수, 금과 화, 목, 토의 메뉴가 달라지는 것이 지구당의 특징입니다. 이 날은 수요일이었고 메뉴는 오야꼬동. 화, 목, 토에는 규동을 판매한다고 합니다. 일요일은 쉬시나 봐요

 

또 하나의 독특한 특징은 가게 입장을 위해 초인종을 눌러 인원을 이야기해주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직접 문을 열지 않기를 권하고 있습니다. 처음 방문하면 이건 뭐지? 싶은 시스템이긴 한데요, 사실 이 가게의 전체적인 컨셉에 어울리는 장치입니다.

 

메뉴판은 깔끔합니다. 메뉴도 극단적으로 적어서 왠지 장인 정신 가득한 음식을 낼 것만 같은 느낌도 드네요.

 

가게 내부는 굉장히 차분하고 조용합니다. 정말 혼밥하기 좋겠어요. 

 

가게 내부는 L형 카운터 좌석이 주방을 감싸고 있습니다. 라멘집들을 비롯해 일식가게들이 주로 취하고 있는 형태입니다. 접객도 과하지 않고 아주 조용조용하면서도 아쉬울 것 없이 손님을 대하는 데, 가게 내부의 차분한 분위기와 잘 어우러집니다. 이런 분위기가 어쩐지 낯설지 않아서 어디서 겪었나 돌이켜보니, 일본에서 밥먹으러 아무데나 들어갔던 식당들이 이런 분위기였던 것 같아요. 차분하게 카운터 석에 앉아서 식사를 주문하고 조용하게 먹고 나가는 그런 느낌이요. 차이점이 있다면 일본 식당들에서는 음식을 기다리며 담배 피는 사람도 있었다는 것 정도

 

가게 분위기가 깔끔하고 차분하지만, 또 세세하게 훑어보면 세련됨과는 거리가 멀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한국 노포식의 수더분한 느낌을 차분함의 컨셉으로 억누르고 있는 듯해보였습니다. 조용조용하게 흘러나오는 일본풍 가요들이 그런 분위기를 더욱 강화했어요. 

 

식사를 기다리며 제 덮밥을 요리하시는 모습을 지켜볼 수 있었습니다. 오야꼬동에 들어갈 닭고기를 팬 위에서 가위로 쉴 새없이 잘게 잘라내시는데 어딘가 모르게 장인스런 느낌이 납니다. 아주 차분한 식당에 가위질 소리만 요란하게 울리거든요. 묘한 대비가 장인의 인상을 주는 것 같아요.  

 

이제 슬슬 식사 준비를 해야겠지요. 어차피 저는 안 먹지만 그래도 동행자는 먹으니 단무지와 생강초절임을 접시에 좀 덜었습니다. 

 

본 식사 전에 일본식 된장국도 한 그릇 나왔습니다.

 

나무로 된 수저도 꺼내 놓구요. 숟가락이 젖은 이유는 아까 미소국을 한 번 떠먹었기 때문. 사진 찍고 떠먹을껄..

 

생맥주 (300ml, 2,500원)

맥주는 인 당 한 잔 씩만 판매한다고 합니다. 어차피 다른 안주메뉴도 없으니 굳이 여기서 한 잔 이상 마실 필요가 없긴 하겠습니다.

 

오야꼬동 (곱빼기, 9,000원)

드디어 본 식사인 오야꼬동이 나왔습니다. 저는 이 날 배가 좀 많이 고팠어서 곱빼기를 시켰습니다. 일반은 천원 저렴한 8,000원이고 닭고기와 밥의 양에만 차이가 있습니다. 일반도 계란은 두 알입니다. 역시 달걀은 두 개가 1인분인 것입니다. 

 

근접샷도 찍어줍니다. 참고로 오야꼬동을 한국말로 직역하자면 부모-자식 덮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닭(부모)과 달걀(자식)이 함께 들어갔다는 의미에서 나온 작명입니다. 그야말로 일본식 변태스런 작명센스

 

각도도 좀 돌려서 또 찍구요. 일단 먹기 전에 많이 찍어줘야지 안 그러면 항상 후회하게 되더라구요.

 

닭고기 근접샷도 찍어줍니다. 맛이 어떨지가 궁금합니다. 백종원 센세 가라사대 음식 맛의 70%는 식당의 분위기와 인테리어가 좌우한다고 했는데, 앞서 지구당의 분위기에는 만족을 했으니 이제 남은 30%를 확인해보는 시간이 되겠습니다.

 

본격적으로 먹기 위해 계란을 터뜨렸습니다. 덮밥이라면 반숙 노른자가 핵심이잖아요.

 

한 숟갈 먹음직하게 떠서 식사를 시작합니다. 오야꼬동 꽤 먹을만 합니다. 아마 쯔유로 냈을 짭쪼름한 간이 전체적인 맛의 인상을 잡고, 오래 볶은 양파의 단맛, 소스를 잘 머금은 닭고기 그리고 눅진한 노른자까지 한데 잘 섞여 들어갑니다. 맛은 딱히 더하고픈 것 없이 잘 잡아냈습니다. 다만 한 가지 제가 아쉬웠던 점은 온도입니다. 덮밥이 펄펄 끓는 국밥만치 뜨거웠어야할 이유가 있었을까요. 사장님의 어떤 노림수가 있었던 것인지 저는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너무 뜨거워서 한참을 식혀먹어야 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한참을 식혀 먹느라 시간이 흐르는 동안 덮밥의 소스들이 점점 밥알 속으로 흡수됩니다. 그래서 저는 오히려 오야꼬동이 식어가면서 더욱 완성된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처음에는 소스가 밥과 따로 노는 느낌이었거든요. 시간이 흐를수록 밥이 소스를 머금고 찐득해지면서 제대로 된 맛을 내는 것 같았습니다.

 

덮밥의 특성상 짭쪼름한 쯔유 맛과 계란 맛에 계속 기대어 가기 때문에 맛이 자칫 단조롭고 물릴 가능성이 큽니다. 그럴때 변주를 줄수 있는 것은 바로 이 시치미의 존재. 

 

시치미를 그냥 처음부터 덮밥에 좀 뿌리고 비벼먹어도 좋겠지만, 저는 오히려 조금씩 물리기 시작할 무렵부터 숟가락 위에 이렇게 직접 뿌려 먹는 것이 더 좋더라구요. 매콤함과 감칠맛이 강하게 더해지며 남은 오야꼬동도 무리없이 먹을 수 있게 해줍니다. 

 

그렇게 먹다보니 어느새 비어버린 그릇. 만족스러운 한 끼였습니다. 

 

총평하자면 지구당에서의 만족스런 식사는, 물론 덮밥 자체도 나쁘지 않긴했지만, 어찌보면 분위기의 승리라고 생각합니다. 차분한 분위기를 적극적으로 끌어오며, 입장부터 인터폰, 요일별 단일메뉴, 접객, 음악 선정까지 일본식 덮밥집이라는 정체성 위에 스스로 유니크함을 부여했습니다. 식당은 단순 요리 한 그릇이 아니라 식사 경험의 총체를 제공하는 공간입니다. 저는 지구당에서 만족스런 경험을 하고 기분 좋게 떠날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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