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일 순대국, 보라매 - 나의 가장 오래된 순대국
- 비정기 간행물/고메 투어
- 2020. 3. 18. 08:37
제일 처음 먹었던 순대국이 기억 나시나요? 제 경우에는 엄마가 포장해온 순대국을 집에서 다 같이 먹었던 기억입니다. 그게 제가 처음 먹었던 순대국은 아닐지 몰라도 제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순대국입니다. 집안으로 퍼지는 쿰쿰한 돼지 냄새 속에서 티비를 보며 잠시 기다리면 어느새 제 앞으로 고기와 내장이 가득한 뜨끈한 국물이 올라옵니다. 내장을 잘 먹을 줄 알아야 어른이다, 다데기를 풀어서 먹어야 어른이야, 뜨거운 걸 잘 먹어야 어른이다, 하는 어른들 말씀에 어릴 적 제 머리 속에 순대국은 어른들의 음식으로 자리잡았습니다.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던 저는 진한 돼지 국물을 입술에 찐득하게 묻혀가며 먹곤 했었지요. 아직도 팔팔 끓는 국물을 냅다 들이마실 수는 없지만 내장도 좋아하고 다데기도 술술 풀어 먹게 된 저는 어느새 그렇게 어른이 되어버린 것 같습니다.
저희 가족이 줄곧 먹어 온, 그리고 저를 어른으로 만들어 준 순대국은 보라매역 근방에 위치한 '서일 순대국'에서 내는 순대국입니다. 간만에 이 곳을 방문했던 이야기입니다.
어릴때는 몰랐지만, 알고보니 '서일 순대국'은 서울에서도 알아주는 순대국 맛집이었습니다. 사실 어릴 때 매번 먹어온 순대국이 '서일 순대국'이다 보니 세상 순대국이 다 여기 만큼 하는 줄 알고 자라왔습니다.
얼만큼 서일 순대국의 위상이 강력하냐면 1호점 바로 옆에 커다란 2호점을 갖고 있을 정도. 지금 사진에 보이는 곳이 1호점입니다.
그 바로 옆 빌딩 일층에 좀 더 큰 규모로 자리하고 있는 게 바로 2호점. 친구들과든 혼자서든 서일 순대국에 방문해서 먹을 때는 항상 2호점으로 가곤 했기에 이 날도 주저없이 2호점으로 입장했습니다. 1호점 2호점 거리가 딱 5미터 차이이기에 딱히 맛이 차이 날 것 같지도 않습니다. 어릴 적 종종 심부름으로 순대국을 사러 가곤 했었는데 포장주문은 아마 1호점에서만 받았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요새는 어떤지 모르겠습니다.
순대국은 8,000원입니다. 순대국 치고 저렴한 가격은 아니지만 그래도 고기가 꽤 실한 편이라 납득 가능.
분명히 이번 여름에 방문했을 때만 해도 철푸덕 좌석이었는데 그새 테이블들이 들어섰습니다. 점점 철푸덕 좌석이 사라지는 것이 최근 식당 문화의 흐름인가 봅니다.
숟가락도 놓고 사진도 찍고 천천히 순대국을 기다리는 중
이 집 깍두기와 김치도 꽤 괜찮은 편입니다.
밑반찬은 요렇게 간소하게 나옵니다. 왠지 오늘은 김치를 좀 먹어야겠어서 김치를 앞접시에 조금 덜었습니다.
제가 주문한 것은 순대국 기본. 이거 먹고 모자르다 싶었던 적이 한번도 없어서 특은 시켜본 적이 없습니다.
팔팔 끓는 순대국이 나왔습니다. 일단 지금은 겁나 뜨겁기 때문에 차분히 기다려줘야 합니다.
사진도 많이 찍고 그러면서 충분히 식기를 기다려야 하는 것입니다.
원래부터 들깨가 꽤 들어있는 것이 바로 서일 순대국의 특징 중 하나. 저는 순대국 먹을 때 항상 들깨를 추가로 더 퍼넣는데 아마 그런 버릇이 여기서 나온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사실 제가 가진 맛있는 순대국의 기준은 바로 '서일 순대국'에서 나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습니다. 어릴 때부터의 조기 학습으로 이미 입이 서일 순대국에 길들여져 있습니다.
밥은 뭐 그냥 밥입니다. 훌륭하게 지은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딱히 떡지거나 하지도 않았으니 아쉬울 것도 없습니다. 어차피 말아 먹을 것이니까요.
푸짐한 건더기와 내장의 양. 아주 좋습니다. 원래 순대국은 고기 다 이만큼 주는 건 줄 알고 자랐습니다. 나중에 동네 밖에서 순대국을 먹다보니 깨우친 매정한 자본주의적 진실
서일 순대국이 다른 순대국집과 가장 차별되는 지점은 바로 순대입니다. 서일 순대국에서 내는 순대에는 야채가 들어 있어 순대피는 쫄깃하면서 속은 아삭하고 시원하게 씹힙니다. 특히 국물을 잔뜩 머금은 야채를 씹는 맛은 제가 이 순대국에서 가장 좋아하는 파트입니다.
사실 20살 넘어서까지 동네 밖에서 순대국을 먹어볼 일이 없었던 저는 세상 모든 순대국에 들어가는 순대가 이런 야채순대인줄로만 알았습니다. 언젠가 다른 곳에서 처음 순대국을 먹을 때 당면 순대를 만나고는 '어 이 집 순대는 왜 이러지' 싶었던 기억이 나는데, 알고보니 서일 순대국의 순대가 특별했던 것이었습니다.
팔팔 끓는 기운이 좀 잦아 들었으니 이제 슬슬 먹을 준비를 시작합니다. 개인적인 취향에 따라 들깨를 한 스푼 푸짐하게 추가했습니다. 원래는 두 스푼 추가하는데 이 날은 그냥 적당히 한 스푼만 추가.
수저를 국물에 담굴 때 회오리치며 옴폭 패인 곳으로 들어오는 들깨가루와 국물을 움짤로 찍고 싶었는데, 약간 귀찮아서 그냥 사진으로만 찍었습니다. 상상력을 발휘하시길
굳이 새우젓을 넣지 않아도 어느정도 간이 맞춰져 있긴 한데 그래도 밥이 들어가면 다시 밍밍해질 테니 새우젓을 좀 풀어넣고 밥을 투하했습니다. 다데기는 조금 먹다가 추가할 예정입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시식합니다. 순대국은 항상 먹기 전에 이것저것 할 일이 많습니다.
국물이 상당히 깊고 진합니다. 입술이 찐득해지는 맛. 사실 어릴 적 제 기억 속에 서일 순대국은 이것보다는 좀더 담백한 느낌이었는데 이날은 특히 진했습니다. 뭐 그렇다고 해도 돼지 냄새가 가득하거나 그렇지는 않아서 아주 거칠지는 않습니다.
깔끔한 국물맛을 어느정도 즐겼으면 이젠 다데기를 풀고 자극적으로 먹을 차례. 조금은 뜨거워도 이제는 어른이니까 개의치 않고 푹푹 퍼먹습니다.
이제 우리가 아는 그 색깔이 나오기 시작하네요. 밥알도 잘 말려서 이제 정말 먹을 일만 남았습니다. 물론 다데기 없이 먹으면 감칠맛이 도드라져서 또 그만의 맛이 있지만, 어쨌든 순대국은 다데기를 넣어야 진짜 완성되는 느낌입니다. 진한 국물 사이로 들어오는 밥알과 그 위에 하나 둘 씩 딸려 올라오는 내장과 고기들. 속이 든든해집니다.
먹으면 먹을 수록 입에 착착 달라 붙습니다. 항상 순대는 마지막 까지 아껴뒀다 먹는 제 스타일. 최대한 국물을 머금기 바라는 마음도 있고 처음부터 먹으면 너무 뜨겁기 때문입니다. 이 시점에서는 밥알들의 전분기도 국물에 풀리고 해서 국물이 슬슬 걸쭉해집니다. 진한 국물과 아주 잘 어우러집니다.
결국 그릇도 45도로 세워서 걸쳐 놓고 밥알 마지막 한톨까지 싹싹 긁어먹었다는 이야기. 영혼이 충만해지는 느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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